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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책을 말하다/개혁주의

아우구스티누스, 피터 브라운

책제목: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e of Hippo) 

저자: 피터 브라운 (Peter R.L. Brown) 

성향: 학문적 

평점: 4/5 














아우구스티누스 - 10점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새물결













아우구스티누스의 교과서 피터 브라운의 증보판 

- 젊은 날에 비판적이었던 한 저명한 학자의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에 대한 전환>을 보여주는 작품 


피터 브라운(Peter Brown, 1935~)의 역작 『아우구스티누스』(새물결플러스)다. 피터 브라운은 신학자가 아니라 세속 역사학자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보다 신한적으로 예리한 전기를 읽기 원하는 독자는 이 책(총 880페이지)보다 몇 배는 압축적인 헨리 채드윅의 작품(총 208페이지)을 가볍게 읽으면 좋을 것이다. 헨리 채드윅은 이 책에 관하여 신학이 빠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전기라 부드럽게 비판한 적이 있었고, 피터 브라운은 이러한 신중한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후에 그는 신학적 색채가 가미된 속전속결의 헨리 채드윅의 작품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아우구스티누스』(시공사 : 2001)) 


그러나 피터 브라운 서술의 강점은 이러한 속전속결에 있지 않다. 그의 서술의 강점은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필치의 역사 서술에 있다. 피터 브라운은 후기 고대와 초기 중세에 관한 제1의 석학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유려한 문체와 꼼꼼한 사료 참고로 정평 나 있다. 마치 문학 작품을 방불케하는 그의 화려하고 풍성한 어휘력이 독자들을 사로잡는다.일반적으로 주제별이 아닌 역사적으로 한 인물을 그려내는 책의 수명은 길다. 독자들은 이 책의 출판이 브라운이 32세 때인 1967년도에 쓰였고 이후 단 한 차례 (2000년) 개정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는 이들의 필독서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도 비판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이 책에 대한 비판점은 이 책의 증보판에서 추가된 2장의 새로운 장을 통해 피터 브라운 자신에 의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글을 비판한 채드윅의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였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책이 더 이상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교과서적 설명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그의 학문적 인생의 말년에 젊은 날에 그토록 비판적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우호적으로 돌아선다는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젊은 날의 자신의 호기에 대해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며 현대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에 대한 동향과 자신의 과거의 실수 혹은 과오를 인정한다. 다음은 피터 브라운이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의 현대적 새로운 증거와 동향이다. 





<최근 아우구스티누스 연구 동향>


1. 16~17세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집이 인쇄판본으로 처음 나왔을 때 그의 설교와 편지는 많은 부분들이 누락되어 있었다. 

1.2. 이러한 현상은 15,000개 이상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 필사본이 유럽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 누락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잡아내는 작업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2. 그러나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1975년과 1990년에 두 번 혁신적인 작업이 이뤄진다. 

2.1. 1975년 오스트리아 학술원(Austrian Academy of Sciences)의 서유럽 모든 아우구스티누스 자료에 대한 목록화 작업에 요하네스 디브야크(Johannes Divjak of Vienna)가 프랑스로 이동하여 마르세유 시립도서관(Bibliotheque Municipale of Marseilles)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27개의 편지를 추가한다. 현재 학자들은 이를 '디브야크의 편지들'이라고 부른다. 편지들은 생의 마지막 10년 간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잘 알려준다. 

2.2. 1990년 프랑수아 돌보(Dolbeau of Paris)는 마인츠 시립도서관에서 26개의 새로운 설교 원고들을 발견한다. 이를 우리는 '돌보 설교들'로 오늘날 부른다. 이 원고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중세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골라내고 유포한 소수의 발췌문을 넘어 설교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3. 위 두 발견은 피터 브라운으로 하여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미지를 재고하게 만들었다. 

3.1. "간략하게 말해서, 나는 돌보 설교와 디브야크의 편지를 통해 1960년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중거를 갖고서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가 훨씬 덜 권위적이고, 덜 완고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624) 

3.2. 피터 브라운은 후기 고대 종교와 사상에 대한 폭넓은 배경지식은 현대적 관점으로 쉽게 전달될 수 없는 주제가 상당하다고 말한다.

3.3. 피터 브라운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기존의 딱딱하고 권위적인 '신학자'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설득하고 두려움 속에 차분히 입을 떼는 '목회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4. 1960년대의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사에 대한 회고와 반성.

4.1. 피터 브라운에 따르면 1960년대의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는 현대화(aggiornamento)가 가능하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러한 한계성은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4.2. 이 '새로운 방향'이란 고대 후기 그리스도교와 고대 후기 다신주의 전체에 대한 연구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연구를 압도하는 영미권의 상황에서 발생한다. 

4.3. 더 이상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는 고전적인 이교도와 그의 사상의 차이를 연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부분으로 쪼개진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작은 전기'들을 가능하게 하는 연구를 촉발시킬 것이다. 

4.4. 이 지점에서 피터 브라운이 평가하는 최근 연구가 거둔 가장 위대한 성과는 주교로서의 그의 삶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695)



5.  1960년대 많은 학자들의 큰 관심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통해 <고전세계>에서 <기독교세계>로의 느린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697)

5.1. 피터 브라운 자신은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에 대한 연구가 아니었던 이러한 연구 경향을 1970년대에서야 비로소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돌고돌아 비로소 아우구스티누스가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5.2. 예컨대 현대적 통속적 관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성관념에 대해 금욕주의적 경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피터 브라운은 이러한 통설이 현대인이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전통에 우뚝 서서 영과 육체를 모두 중시하는 성에 관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한다. 

5.3. "아우구스티누스가 우리를 위해서 잠자리를 마련해준 것은 아니다.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대개 그를 잘못 표현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도 그 침상을 진지하고 서서히 재조직하는 과제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라는 먼 과거의 거울에서 현재 우리의 모든 불만들을 얼핏 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진실로 언어도단의 문화적 자기도취증이다."(701)


6.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혐의.

6.1. 힐러리 암스트롱은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플로티노스의 경화되고, 굳어 버리고, 다소 빈곤화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라고 추측하며 그의 사상에 대해 혹평한다. 

6.2. 그러나 이러한 혹평을 피터 브라운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가 광범위하게 오해되고있을 뿐 정확히 정통적인 기독교적 사상임을 간파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플라톤 체계를 다루는 솜씨는 매우 탁월하다고 그가 플라톤 체계를 옹호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6.3. 피터 브라운의 생각을 직접 들어보자. "그는 우주(cosmos)가 장엄하다는 플라톤의 인식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의 영혼', 즉 장엄한 세상의 영혼(anima mundi)이 자연계 전체에 생명과 활력을 주었다는 플라톤의 관념을 흥미 없고 기본적으로 불필요한 사색으로 간주했다"(704),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무게중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우주는 대체적으로 종교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는 좀 더 긴박한 문제, 즉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손을 뻗으실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였다"(706), "기독교 신자들이 이제 귀 기울여 할 운율을 가진 힘 있는 유일한 노래는 우주의 조화로운 소리가 아니었다"(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