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 출판사에서 화려하고도 자극적으로 소개된대로 이 책의 저자 침신 출신의 신광은 목사는 이 책에 사람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회자되는 소위 말하는 '대형교회'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는 순전히 출판사가 책을 많이 팔기 위한 장치로서 이 책에 근거하지 않은 과대 홍보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책 자체가 실제로 교회에 대한 자극적인 비판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다소 감정적이고 비판을 위한 비판에 머문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필자가 이 책에서 발견하는 문제점들을 차례대로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과연 교회는 반드시 반反문화적이어야만하고, 또 실제로 그러했는가?
신광은 목사는 메가처치가 "세상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27), "포스트모더니티 역시 과감하게 수용", "세속적인 조류와 긴밀하게 연관", "성령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기에 앞서.. 태생적으로 세속적"(28)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작은 교회(저자가 거의 '옳은 교회'와 동일시하는)는 그러면 세상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안 해왔었고, 또 안 수용해야만 하는 문제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과연 저자는 이단 분파가 아닌 어떤 교회가 시대상의 변화와 함께 호응하지 않으며 이상의 기치만을 내세웠는지 단 하나의 사례라도 제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교회사에 대한 깊은 연구는 반드시 그 당대의 사회 구조적인 교회의 태동을 엿보게 만든다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2. 과연 "대중", "도시화", "테크놀리지" 이 세 가지는 절대악인가?
이 책의 2장에서 저자는 메가처치의 사회적 조건으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세 가지를 꼽으며, 이 모두를 부정적으로만 몰아갑니다. 필자는 이런 단순한 논리에 상당한 의아함을 느낀다. 아무리 이곳저곳 책을 뒤져봐도 이러한 단순한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단 하나도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 상식적으로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 도시에 기초한 대형교회를 비판하며 "초대교회도 도시에 있었지만 그들은 철저히 반反도시적이었다"(31)라는 단 하나의 유의미한 논증을 2장에서 제시할 뿐인데, 저자가 깨닫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역시 유치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예리한 독자들은 이내 파악할 것이다. (1세기 도시와 20세기의 도시는 단순히 우리의 상상의 나래 속에 단 하나의 동일체로 접착시킬 수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개체다.)
3. 전지전능한 메가처치?
"바보제 the feast of fools"(27), "적응된 교회"(31), "점퍼들jumpers의 교회"(32), "테크노처치"(33), "시장교회market church"(34) 등. 이런 필자가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풍자는 둘째치고, 우리는 저자가 다음과 같은 전지전능한(almighty) 메가처치라는 '허구적 이미지' 만들기 시도에 각별한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메가처치는 마음먹은 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다. 초 단위, 분 단위로 계획된 큐시트에 의해 통제되는 메가 처치의 예배는, 원하는 시점에 목표하는 만큼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점에 78퍼센트의 청중을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랃믈은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33-34). 이에 한번 필자는 이 책의 저자에 묻고 싶다. 어떤 교회에서 이런 놀라운 사역이 가능하냐고 말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역은 세속 매체에서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자하고도 소수 몇 프로만 성공하는 사역이다. 저자는 어떤 근거에서, 어떤 교회에서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 또 성도들의 반응과 기호가 과연 그렇게 위에서 기획된대로 움직이는지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만 그의 논거에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4. 사실 관계의 문제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이 책이 학문적이지 않으며, 세밀한 주석이 빠져 있고, 문체상의 결함이나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미리 예고한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의 정확성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이와 똑같은 잣대를 21세기 초의 초대형밀리언셀러 『다빈치코드』의 댄 브라운에게 적용한다.)
예리한 독자들은 이 책의 3장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저자는 현대교회가 "나를 따르라"는 지엄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 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행위>로 바꾸어놓았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과연 이는 사실일까?그는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 달라'고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고객이며 구매자"다라고 비꼬는데, 왜인지 그의 이 말에야말로 성직에 대한 프라이드(혹은 그의 표현대로 '거드름')가 짙게 뭍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는 교회가 보다 엄격해질 것을 요구하며, 그 근거로 초대교회를 내세운다. (계속적으로 필자가 이 책에서 의아함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저자가 초대교회를 불필요하게 이상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초대교회가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책 참고문헌은 도대체가 어디가 어떻게 인용된 것일까? 다른 교회도 아니고 초대교회 사람을 구분(차별)했을까? 물론 그러한 전례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초대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 어쩌면 필자는 "엄격한 심사", "오늘날의 천박한 기독교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한다는 그의 말에는 그가 초대교회와 '엄격한' 청교도주의(청교도주의에서조차 그 내부의 강경한 일부 세력일 뿐인)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교회의 상품화 현상?
필자는 예전에 데이비드 웰즈(David Wells, 1939~)의 『윤리실종』을 다루면서, 필자는 교회의 상품화 현상을 비판하는 복음주의 진영조차도 이미 그 현상 안에 갇혀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교회의 상품화 현상은 분명히 지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류의 비판에 조심스러운 것은 교회의 모든 사역은 항상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용법일 뿐이긴 해도 - 상품화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판단에 기초해서 교회의 사역을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을 따라 우리의 사역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자신이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눈에 보기에 가시적으로 사람들이 빵을 먹고 배부른 현상을 좋다고 말하지, 사람을 죽였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니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교회의 사역이 <모델화>(비판적 견지에서는 상품화라고 일컬어지는)되는 경향까지 막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분별한 따름인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현행 대형교회가 이런 모델화 작업에 어떤 방식으로든 매우 성공적으로 접근했고, 또 영향력을 끼쳤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형교회를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하는 이 책 류의 주장에 주의를 기할 필요가 있다.
6. 성경적으로 교회의 '크기'는 어디까지나 중립이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크기는 본질에 영향이 미친다!"(87)라는 이 책의 기본 주장에 필자는 백번 동감한다. 하지만 크기가 중요하다며, 대형교회를" 20미터의 인간"이라는 일종의 "괴물"(혹은 성장 억제 호르몬이 상실된 "암덩어리")로 비유하는 그의 과한 주장에는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결국 메가처치도 교회라는 것이라는 대형교회 옹호론자들의 주장을 일축하며{"얼토당토 않는 얘기"(88)}, 메가처치는 교회가 아니라고 암시할 뿐이다. 저자의 말대로 분명히 한 나라와 국가, 그리고 모든 인간의 제도들은 크기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문제"들에 접근하게 되고, 또 그에 따라 변형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차원의 문제"들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에서, 어떤 한 기둥에 중심을 두는 문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 꼭 이 책의 독자들이 이 새로운 문제들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해야 하는지 그는 이 책 어디에서도 그 구체적인 근거를 밝히지 않고 있다.
7. 과연 성서는 큰 것을 싫어하는가?
저자는 크기에 대한 성서의 관점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큰 것은 싫어하시고, 작은 것을 돌아보신다는 것"(103)이다. 하나님께서 작은 것을 돌아보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많은 부분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은 물질의 양과 재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충분히 주의를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욥 42:12;시34:10) 현재 많은 개혁세력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물질적 축복과 그 크기를 하나님께서 '꼭' 나쁘게만 생각하지 않으실 뿐더러,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긍정적으로 해석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교회개혁세력들은 호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역시 - 우리가 면밀히 사복음서를 검토할 때 - 대중성과 크기에 결코 초연하지 않다. 저자가 인용하는 겨자씨 비유만 해도 우리는 결국 그 겨자씨가 곧 "크게 될 것이다"라는데 말씀의 포인트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성서는 하나의 해석학적 관점이 꿰뚫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저자의 말처럼 성서의 말씀이 단순히 하나의 메시지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결론과 제언 - 대안이 있는 대형교회 비판을 기다리며
결국 이 책의 내용들은 전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안타깝게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런 현상은 심화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며,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언제나 대형교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형교회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 견지는 최소한 이 책에서와 같은 근거들에 의한 것은 아니었고, 지금도 아니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단지 "더 나은 길"이 있다는 것일 뿐이다. 대형교회를 비판할 때는 대안이 분명해야 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피값을 죽 산 교회의 개혁은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뉴스앤조이가 지향하는 바처럼 교회개혁은 언론플레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섣불리 대형교회를 비판하고, 거기에도 부족해서 성도들이 이제는 소비자가 되었다고 책임을 전가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성도들을 향하여, 또 대형교회들을 향하여 더 매력적이고 더 위대한 가치가 여기 바로 작은 교회에 있다고 단순히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때, 머지않은 미래에 어떠한 의미에서든 작은 교회는 더 이상 작은 교회로 남지 않을 것이다.
아마 미래를 사는 우리의 후손들은 작은 교회의 가치를 실현한 우리를 보며, "왜 교회는 성당처럼 화려하지도, 세련되지도, 현대적이지도 않은거야?"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대형교회 역시 결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앞에서는 무언가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세상의 모든 것은 돌고 돈다. "강한 자가 약하게, 약한 자가 강하게". 참된 성도들은 이 책처럼 스스로가 무언가가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되는 양 핏대를 올리며 싸우기보다는 단순히 그것의 단점과 약점을 보완해주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와서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천천히 진행해나가면 충분하다고 믿을 것이다.